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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소아 권고 예방접종 항목을 대폭 축소하는 정책 개편을 단행함에 따라 미국소아과학회(AAP)를 비롯한 의료계와 연방 보건당국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CDC의 이번 결정은 수십 년간 유지되어 온 공중보건 원칙을 뒤흔드는 조치로 평가받으며 법정 공방으로까지 비화했다.
CDC는 지난 1월 5일 기존 17종이었던 소아 권고 백신 중 인플루엔자, 코로나19, 로타바이러스, 수막염, A형 간염, B형 간염 등 6종을 제외하는 수정안을 발표했다. 이와 함께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RSV) 예방접종 권고를 제한하고, 인유두종바이러스(HPV) 백신의 경우 기존 2회 접종 대신 1회 접종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지침을 확정했다. 해당 변경 사항은 공표와 동시에 즉각 발효됐다.
이번 조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전면적인 과학적 재평가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보건당국의 입장이다.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은 성명을 통해 이번 결정이 덴마크 등 10종의 질병에 대해서만 접종을 권고하는 다른 선진국들의 사례와 국제적 합의를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증거에 대한 철저한 검토를 거쳐 미국의 소아 백신 일정을 국제적 수준에 맞추고 투명성과 고지된 동의를 강화함으로써 공중보건에 대한 신뢰를 재건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미국소아과학회(AAP)는 지난 1월 26일 CDC의 방침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2026년판 소아 예방접종 일정을 별도로 발표했다. AAP는 RSV, 인플루엔자, B형 간염, 홍역을 포함한 18종의 질병에 대한 백신 접종 권고를 그대로 유지했다. 앤드류 라신(Andrew Racine) AAP 회장은 "AAP는 과학에 기반하여 영유아와 청소년의 건강에 최선의 이익이 되는 예방접종 권고안을 지속적으로 제공할 것"이라며 루틴한 소아 예방접종이 평생 건강의 중요한 첫걸음임을 강조했다.
의료계 전문가들은 연방 보건당국의 이번 검토 과정이 과학적 엄밀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국가마다 질병 역학과 위험 대비 이익 평가 기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타국 사례를 기계적으로 적용했다는 지적이다. 미국 의학협회(AMA)를 포함한 12개 주요 의료 단체는 AAP의 독자 지침에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데이비드 아이주스(David Aizuss) AMA 이사회 의장은 "연방 백신 일정의 전례 없는 변화가 수십 년간의 과학적 진보를 위협하고 있다"며 학부모들에게는 근거 중심의 명확한 지침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현재 AAP와 의료 제공자 단체들은 지난 1월 19일 CDC의 새로운 예방접종 지침 시행을 중단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장관 취임 이후 CDC 예방접종자문위원회(ACIP)의 전면 재구성, 신생아 B형 간염 백신 권고 약화, 소아 백신 자문위원회 위원 해임 등 보건 행정 전반에서 백신 회의론적 기조가 강화됨에 따라 의료계와의 대립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