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릴리가 1조 원을 쏟아붓는 이유… AI는 대체 신약개발의 '무엇'을 바꾸고 있나
2026년 1월, JP 모건 헬스케어 컨퍼런스에서 글로벌 제약업계의 시선을 사로잡은 발표가 있었다. 엔비디아(NVIDIA)와 일라이 릴리(Eli Lilly)가 5년간 최대 10억 달러(약 1조 4,000억 원)를 투입해 샌프란시스코에 AI 공동 혁신 연구소를 설립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미 릴리는 지난해 10월 1,000개 이상의 블랙웰 울트라 GPU로 구동되는 '제약업계 최강' AI 슈퍼컴퓨터를 가동하며 AI 인프라 구축에 속도를 내왔다.
릴리의 데이비드 릭스(David A. Ricks) 회장은 이 자리에서 "각각의 저분자 신약 발견은 마치 예술 작품과 같다. 이것을 장인정신의 약물 제조에서 엔지니어링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인류의 삶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보라"고 강조했다. 반도체 기업이 제약사와 손을 잡는, 불과 몇 년 전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웠던 풍경이다.
이것은 비단 릴리만의 행보가 아니다. 올해 들어 로슈는 엔비디아와 대규모 AI 팩토리 구축에 나섰고, 노보 노디스크는 오픈AI와 손잡고 신약개발·제조·공급망 전반에 AI를 도입하고 있다. 머크 역시 구글 클라우드와 협력해 R&D와 제조 영역에 에이전틱 AI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AI는 이제 특정 후보물질을 찾는 보조 도구를 넘어, 글로벌 제약사의 R&D 인프라와 운영 체계 자체를 바꾸는 핵심 기술로 올라서고 있다.

도대체 AI가 신약개발의 ‘무엇’을 바꾸기에, 세계 최대 제약사들이 이처럼 공격적으로 투자에 나서고 있는 것일까. 전통적인 신약개발은 평균 10년 이상의 시간과 수십억 달러의 비용이 소요되며, 임상에 진입한 후보물질의 상당수가 최종 승인에 도달하지 못하는 고위험 산업이다. AI는 이 과정에서 타깃 발굴, 분자 설계, 독성 예측, 임상 설계까지 개입하며 시간과 비용을 압축하고 실패 가능성을 조기에 걸러내겠다는 약속을 내걸고 있다.
그리고 2025년, 그 약속이 처음으로 '인간'에서 입증됐다. AI가 발굴한 질환 타깃에 대해 AI가 설계한 분자가 환자에서 유효성을 보인 최초의 2a상 임상 결과가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 메디신(Nature Medicine)》에 게재된 것이다. 더파마뉴스는 이번 프리미엄 인사이트+에서 AI 신약개발의 현주소를 선두주자 인실리코 메디슨을 중심으로 심층 분석하고, AI가 바꿀 신약개발의 미래를 전망한다.
AI는 신약개발의 '어디에' 쓰이는가 — 밸류체인별 적용 지도
AI 신약개발을 이해하려면, 먼저 전통적인 신약개발 과정에서 AI가 어떤 단계에 어떻게 개입하는지 그림을 그려야 한다. 크게 네 가지 핵심 영역으로 나뉜다.

신약개발의 출발점은 질환의 원인이 되는 단백질이나 유전자, 즉 '약물 표적(Drug Target)'을 찾는 것이다. 과거에는 수년에 걸친 기초 연구와 문헌 탐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AI는 유전체·전사체·단백체 등 대규모 멀티오믹스 데이터를 통합 분석해 질환과 연관된 유전자 및 경로를 수일 내에 우선순위화하면서 이 단계의 효율을 끌어올린다. 이 과정에서 인간 연구자가 놓치기 쉬운 신규 타깃을 발굴하는 것이 핵심이다.
타깃이 확정되면 이를 효과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화합물을 찾는 분자 설계(De Novo Drug Design) 단계로 넘어간다. 기존에는 수백만 개의 화합물 라이브러리를 물리적으로 스크리닝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생성형 AI는 이 지점에서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 자연어를 생성하는 대규모 언어 모델(LLM)처럼, 분자 생성 모델은 원하는 약리 특성을 만족하는 새로운 화학 구조를 가상 공간에서 직접 설계한다. 이론적으로 무한한 화학 공간을 탐색할 수 있게된 것이다.
후보물질을 도출했다고 끝이 아니다. 아무리 우수한 분자라도 체내에서 흡수가 안 되거나 독성을 유발한다면 약으로 쓸 수 없다. 전임상 단계에서 후보물질의 흡수(Absorption), 분포(Distribution), 대사(Metabolism), 배출(Excretion), 독성(Toxicity)을 예측하는 ADMET 평가는 그동안 동물실험에 크게 의존해왔다. AI는 분자 구조만으로 이들 특성을 예측하는 모델을 구축해, 잠재적 실패 후보를 조기에 걸러낸다. 최신 AI 모델의 독성 예측 정확도는 75~90%, 효능 예측은 60~80% 수준으로 보고되고 있다.
AI의 영향력은 실험실을 넘어 임상 단계까지 확장된다. 환자 모집에 필요한 바이오마커 선정, 임상시험 디자인 최적화, 탈락률 예측 등에 AI가 활용되며 임상시험의 효율성과 성공 확률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정리하면, AI는 타깃을 찾고, 분자를 설계하며, 성공 가능성을 예측하고, 임상을 최적화한다. 이 네 단계를 하나의 AI 플랫폼으로 통합해 엔드투엔드(End-to-End)로 구현하겠다는 것이 AI 신약개발의 궁극적 목표이다. 그리고 이를 가장 먼저 현실로 옮겨 임상에서 증명해 보이는 기업이 바로 ‘인실리코 메디슨’이다.
인실리코 메디슨 —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까지, AI 신약개발의 첫 번째 증명"
2014년 설립된 인실리코 메디슨(Insilico Medicine)은 앞서 설명한 신약개발의 네 단계를 하나의 AI 플랫폼으로 관통하는 엔드투엔드 전략을 가장 먼저 임상에서 입증한 기업이다.

인실리코의 핵심은 AI를 특정 단계의 보조 도구로 쓰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핵심 플랫폼 Pharma.AI는 타깃 발굴, 분자 설계, 전임상 예측, 임상 성공 가능성 평가를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한다. Biology42는 멀티오믹스 데이터와 논문·특허·임상시험 정보를 통합 분석해 질환과 관련된 타깃 후보를 우선순위화한다. 이후 Chemistry42는 해당 타깃을 조절할 수 있는 신규 분자 구조를 생성형 AI로 설계하고, ADMET·오프타깃·결합력 예측을 반복하며 후보물질을 최적화한다. 마지막으로 Medicine42는 임상시험 성공 가능성을 예측해 임상 설계에 활용된다.
각기 다른 팀이 순차적으로 수년에 걸쳐 수행하던 작업을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인실리코는 전임상 후보 도출까지의 시간을 전통 방식의 54개월 이상에서 평균 12~15개월로 단축했다. 비용은 4억 달러 이상에서 300~500만 달러 수준으로 압축됐고, 합성이 필요한 분자 수도 약 1,000개에서 60~200개로 줄었다. AI가 초기 단계부터 후보물질의 품질을 끌어올려 불필요한 실험 차레를 줄여낸 결과다.
이 플랫폼의 잠재력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자산이 특발성 폐섬유증(IPF) 치료제 렌토세르팁(Rentosertib)이다. 인실리코는 Biology42를 활용해 기존 연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키나아제 TNIK를 IPF의 신규 타깃으로 발굴하고, Chemistry42로 이를 억제하는 화합물을 설계해 18개월 만에 전임상 후보를 도출했다.
2025년 6월 《네이처 메디신》에 게재된 2a상 결과에 따르면 71명의 IPF 환자 가운데 60mg 투여군은 12주 만에 폐기능(FVC) 98.4mL 개선을 기록했다. AI가 발굴한 타깃에 AI가 설계한 분자가 인간에서 유효성을 입증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됐다. 회사는 현재 글로벌 규제당국과 후기 임상 설계를 협의 중이다.

2026년 3월 기준 인실리코는 총 28개 개발 후보물질을 도출했으며, 12개가 IND 승인을 받았고, 릴리·사노피·엑셀릭시스·세르비에 등과의 기술이전·협력 계약 총 규모는 40억 달러를 넘어섰다. 2024년 매출 8,580만 달러로 전년 대비 68% 성장했으며, 2025년 12월 홍콩증권거래소 상장에도 성공해 AI 신약개발 기업 중 가장 앞선 상업화 궤도에 올라 있다.
AI가 바꿀 신약개발의 내일
AI가 신약개발의 속도와 효율을 혁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의문의 여지가 없다. 릴리와 엔비디아가 수조 원 규모의 공동 인프라를 구축하고, 사노피·노바티스·아스트라제네카 등 빅파마가 앞다퉈 AI 바이오텍과 수십억 달러 규모의 협력에 나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10년의 시간과 20억 달러의 비용, 그리고 90%의 실패율이라는 벽 앞에서 전통적 방식만으로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한 혁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산업 전반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인실리코 메디슨이 18개월 만에 전임상 후보를 도출하고, AI가 발굴한 타깃에 AI가 설계한 분자로 인간에서 유효성을 입증한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AI가 신약개발의 전 밸류체인에 본격적으로 침투하면서, 이 산업의 패러다임은 '시행착오 기반의 장인정신적 발견'에서 '데이터 기반의 엔지니어링적 설계'로 전환되고 있다. 그 파급력은 단순한 효율 개선을 넘어, 기존에 '약으로 만들 수 없다(undruggable)'고 여겨졌던 표적까지 공략 가능한 영역을 열어젖힌다는 데 있다.
물론 AI는 실패를 없애는 마법이 아니다. 궁극적 검증은 여전히 환자 대상 후기 임상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럼에도 빅파마들이 이토록 공격적으로 베팅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AI가 가져다줄 신약개발 패러다임의 전환, 그 파급력은 제약·바이오 산업의 지형 자체를 다시 그릴 만큼 거대할 것으로 전망된다.
Editor 남호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