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1월, 삼성바이오에피스(Samsung Bioepis)가 삼성그룹 최초의 비(非)오너일가 출신 여성 전문경영인을 수장으로 맞이했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당시 정기 임원인사를 통해 김경아 부사장을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 내정했다고 발표했다. 해당 인사는 삼성 내 여성 인재들에게 명확한 성장 비전을 제시하고 전문성 중심의 성과주의를 공고히 하겠다는 그룹의 의지가 담겨 있다. 삼성바이오에피스 측은 인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여성 인재들에게 김 사장의 취임이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롤모델이 되어 조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김경아 사장은 196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약학과 학사와 석사를 거쳐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Johns Hopkins University)에서 독성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정통 R&D 전문가다. 미국 바이오 벤처인 누벨로(Nuvelo Inc)와 스템라이프라인(StemLifeLine Inc)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글로벌 현장 감각을 익혔다. 2010년 삼성전자(Samsung Electronics) 종합기술원 바이오신약그룹장을 거쳐 2015년 삼성바이오에피스 개발본부에 합류한 그는 개발2본부장, 개발본부장 등을 역임하며 바이오시밀러 개발, 공정, 품질, 인허가 등 사업 전반을 총괄해 왔다.
김 사장은 서울대학교 총동창회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경영 철학에 대해 “경영의 핵심은 사람이며, 직원 개개인이 역량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진정성 있는 소통을 통해 신뢰를 쌓고자 노력해 왔다”고 밝히며 인재 중심의 리더십을 강조한 바 있다. 이 같은 철학은 실행으로도 이어졌다. 2025년에는 업무 시간의 20%를 교육에 할당하는 사내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직업훈련 환경을 구축한 공로를 인정받아 고용노동부 장관 표창을 수상했다.

김 사장의 취임 시점은 삼성의 바이오 사업의 대대적인 구조 개편과도 맞물렸다. 2025년 삼성바이오로직스(Samsung Biologics)는 위탁개발생산(CDMO) 사업을 영위하는 존속법인과 바이오시밀러 및 신약 개발 사업을 총괄하는 신설 지주사 ‘삼성에피스홀딩스’로 분리되었다. 이는 CDMO 고객사들이 자사 제품의 복제약(바이오시밀러)을 개발하는 삼성바이오에피스와의 이해상충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데 따른 전략적 선택으로 풀이된다. 이에 김 사장은 신설 지주사의 초대 수장으로서 독립 경영 체제를 구축하고 글로벌 파트너사들과의 신뢰를 공고히 해야 하는 과제를 맡게 됐다.
독립 법인 출범 후 첫 성적표는 시장의 기대감을 높였다. 삼성에피스홀딩스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매출액은 4,549억 원, 영업이익은 1,440억 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4%, 13% 증가한 수치로, 연초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했던 10% 이상 성장 목표를 상회한 성과다. 바이오젠(Biogen)과의 판권 연계 마일스톤 유입과 더불어 기존 제품의 견조한 시장 점유율이 실적을 뒷받침했다.

상업화 전략의 실행력도 빠르게 가시화되고 있다. 취임 이후 첫 주요 상업적 성과로 꼽히는 것이 희귀질환 치료제 ‘에피스클리(EPYSQLI, SB12)’의 미국 시장 출시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2025년 4월 테바(Teva Pharmaceutical Industries)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에피스클리를 미국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에피스클리는 알렉시온(Alexion)이 개발한 초고가 희귀질환 치료제 솔리리스(Soliris, 에쿨리주맙)의 바이오시밀러로, 발작성 야간 혈색소뇨증(PNH), 비정형 용혈성 요독 증후군(aHUS), 전신성 중증 근무력증(gMG) 등의 적응증을 보유하고 있다. 오리지널 대비 30% 낮은 가격으로 출시됐으며, 유럽에서는 이미 독일·이탈리아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는 등 글로벌 희귀질환 바이오시밀러 시장에서 입지를 확대하고 있다. 김 사장은 에피스클리에 대해 “초고가 바이오 의약품에 대한 환자들의 접근성을 확대함으로써 바이오시밀러 개발의 본질적 의미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의약품”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신약 R&D 영역에서도 전략과 성과가 동시에 가시화되고 있다. 김 사장은 올해 초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제44회 JP모건 헬스케어 컨퍼런스(JPMHC) 기자간담회에서 “기술 개발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임상 1~3상, 신약 허가를 넘어 실제 시장에서 10~20년 동안 환자들을 도울 때까지 전 주기적 플레이어 기업이 한국에서도 나와야 한다”며 ‘한국형 빅파마(Big Pharma) 모델’의 정립을 핵심 목표로 공식 선언했다. 삼성에피스홀딩스 대표 취임 후 첫 공식 석상이었던 이 자리에서 그는 매년 1개 이상의 신약 후보를 임상에 진입시키겠다는 구체적인 로드맵도 함께 제시했다.
이 약속은 불과 수개월 만에 첫 결과물로 이어졌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최근 미국암연구학회(AACR 2026)에서 자사 최초의 신약 파이프라인인 ‘SBE303’의 전임상 데이터를 공개하며 글로벌 임상 1상 진입을 본격화했다. SBE303은 국내 인투셀, 중국 프론트라인과의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확보한 넥틴-4(Nectin-4) 표적 ADC 항암제로, 전임상에서 기존 치료제 대비 피부 독성 완화 및 간질성 폐질환(ILD) 미관찰이 확인됐다. 김 사장은 “삼성바이오에피스는 현재 바이오시밀러에서 신약 개발로 넘어가는 중요한 변곡점에 서 있다”며, 특히 희귀질환 치료제와 유전자 치료제 분야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며 삼성바이오에피스를 패스트 팔로워에서 퍼스트 무버로 전환하겠다는 포부를 구체화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바이오시밀러의 과학적 언어와 전문 경영인의 비즈니스 언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김 사장의 리더십이 지배구조 개편 이후의 불확실성을 조기에 해소했다고 평가한다. 아일리아(Eylea) 바이오시밀러의 글로벌 특허 합의 완료 등 중장기 모멘텀이 확보된 상황에서, R&D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 과학자이자 신약 개발에 남다른 열정을 지닌 김 사장의 선임은 삼성바이오에피스가 글로벌 톱티어 바이오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강력한 엔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